저는 요즘 생소한 식물의 이름을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마음, 명명하기 어려운 모호한 감정을 바라보는 관점. 이 두 가지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어요. 오늘은 낯선 식물이 낯선 그대로 존재하도록 두는, 거추장스럽고 무용한 형용으로 마음 상태를 규정하지 않는, 식물과 감정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어쩌면 그 시선을 이야기하기 위해 ‘침묵’이라는 소통 방식을 빌려오게 되는 것 같아요. 아랍 속담 중 ‘침묵의 나무는 평화의 열매를 맺는다’는 속담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이 문장이 유독 마음에 깊이 남아요. 평소 나의 침묵이 이어지는 경로를 추적해 보라고 하셨지요. 침묵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 속에서 이제는 한계라고 느낄 때 다급하게 누르는 일시 정지 버튼이었어요.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도 있고요. 그래서 그 모호한 고통의 감정을 하나의 이름으로 끄집어내는 것, 내가 느끼는 그 모호함을 입 밖으로 내뱉도록 요구당하는 것은 저에게 생각보다 큰 어려움이었어요. 사실 이러한 태도가 감정 방치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해명하고 증명할 수 없다면, 제 감정을 정성스럽게 뭉그러뜨려서 오독하고 싶었을지 몰라요. 이건 감히 성의 있는 무심이라고 일컫고 싶습니다.
저의 작업에서 침묵은 모호함을 표출하는 방식이고, 식물은 그 방식을 표상하고 있어요. 식물은 살아있으면서 말을 못 하는 생물이지만, 생존 의지를 품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항상성을 유지하는 면이 인간의 몸과 닮았거든요. 요즘 제가 그리는 식물은 대부분 뾰족한 가시나 털로 뒤덮여 있어요. 그리고 검은색 덩어리를 품고 있거나 밖으로 둥글게 뻗치고 있어요. 최근 제가 참고하고 있는 식물은 마치 건들면 후두두 떨어질 것 같은 어떤 씨앗 알맹이를 가득 머금고 있는 모습이 꽤 매력적이에요. 누군가는 징그럽다고도 하지만요. 징그럽고 기이하게 생긴 식물에 제 심상을 투영해서 새로운 식물로 그리는 일을 좋아합니다. 차차 그 좋아함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겠지요.
평소 제가 그리는 식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질문을 많이 받곤 해요. 전 검세 보이는 식물을 이미지 자체로 마주하기 때문에 식물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은데, 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해서 흥미롭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의 식물을 관조하는 태도가 감정을 대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했어요.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식물 형상으로 함축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공부가 많이 필요해 보여요.
말이 길어졌지만, 이전 작업과 달리 감정을 규정짓고 싶지 않은 ‘모호함’은 작업의 주요한 단초예요. 침묵은 과연 개인의 정서에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결국 나는 이 침묵을 깨고 어떤 이야기로 나아갈지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생각해요.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서서 그동안의 작업을 짧게나마 돌아봤어요. 종종 편지하겠습니다.
작업노트 <어떤 편지>, 2024년 12월
피부에 와닿았던 감각으로 ‘증언하는 몸’을 떠올려본다. 일상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았던 여성의 질병, 멍과 같은 고통의 흔적을 추적한다. 동시에 타인에게 드러냈을 때 치부가 될 수 있는 질병을 발화하고 싶은 욕구에 주목한다.
나는 마음에 고인 부정적인 감정을 ‘정서적 염증’으로 읽는다. 그 정서적 염증이 침묵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피부와 식물의 형상으로 제시한다. 식물의 성장과 신체의 상처 회복은 모두 서서히 진행되며 시간의 흔적을 품는다. 뾰족한 가시처럼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털로 덮인 봉오리, 그 틈 사이로 솟아난 질고 선명한 새검은 덩어리, 피부의 염증과 멍 색감을 띠는 연약한 종이. 이 형상을 일상에서 체감한 정서적 염증과 고통, 그 고통으로 인한 침묵의 흔적, 침묵으로 서서히 치유되며 이내 재생하는 새로운 자생체로 제시한다. 이에 침묵으로 작고 큰 억압에 대한 저항과 자기 보존의 의지를 함께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동양 재료를 다루는 느린 공정—감정을 다스리는 방식을 유비하고, ‘시간을 충분히 두고 바라보는 태도’를 조형 과정에 적용한다. 얇거나 도톰한 한지의 결은 마음의 피부를 대변한다.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층위가 다르듯이, 물감은 견고하고도 유약하게 종이 위에 층층이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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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검은 결실〉, 〈홀맺힌 침묵〉(2025)은 신체를 닮은 덩어리, 가시, 털, 씨앗 등 여러 요소가 뒤섞인 낯선 생장체로 등장한다. 건드리면 후두둑 떨어질 듯한 씨앗의 형체, 뾰족한 가시처럼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털로 덮여있는 봉오리는 신체와 식물의 경계를 흐리며,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복합적인 결을 드러낸다. 이는 감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일한 서사가 아닌 여러 층위를 품은 감정의 생장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
〈단단한 연고〉(2023–2024)에서는 피부를 ‘무른 땅’으로 설정하고, 그 위에 돋아나는 염증과 상처의 단계들을 늘어놓은 후, 손바느질로 거대하게 엮어냈다. 얇은 한지 표면에 상처가 고이고, 짓무르고, 터져버리는 과정이 3겹의 레이어로 겹쳐지면서 상처와 회복의 과정을 은유하는 동시에, 관람자가 상처의 시간성을 직접 체감하도록 유도한다.
〈침묵의 나무가 맺은 평화의 열매〉(2024)는 침묵 속에서 자라난 내면의 염증을 형태화한 작업이다. 뾰족한 가시로 뒤덮인 외피 속에 연약한 열매가 실과 솜으로 봉합된 채 놓여 있으며, 이는 상처와 보호, 위협과 회복이 공존하는 몸의 양가적 상태를 드러낸다. 이처럼 작품에서 제시되는 형상들은 일상적 경험에서 비롯된 정서적 염증과 침묵의 흔적을 기반으로 하며, 침묵이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새로운 자생체로 변모하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나는 이러한 형상화를 통해 침묵 속 감정의 생존 방식,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저항과 자기 보존의 감각을 드러내고자 한다.
작업노트 <증언하는 몸>, 2026년 1월
흐릿한 하늘 아래서 한껏 비 맞은 나무를 보며 걷는다. 내가 좋아하는 축축한 녹색을 입고, 비 맞은 나무는 길가에 느지막이 서 있다. 봄비의 색이다. 초여름이 성큼 온다.
식물의 신비로운 색감에 여전히 매료된 나는 점차 다채로운 자줏빛, 보랏빛으로 작업실 벽을 하나둘 채운다. 벽 곳곳에 걸린 산호, 자, 연지, 기색, 흑색의 작업을 지긋이 바라본다. 얼마 전 중고로 구매한 둥근 액자는 그 고동색 빛깔과 굴곡이 곱다. 스위스에서 약 15년 전에 구매한 빈티지 액자라고 들었다. 하루빨리 액자에 똑 맞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기대를 한다. 분주한 하루 끝에서 고개 들어 어둑해지는 하늘에 눈을 맞춘다. 자전거 페달을 세게 밟는다. 끝내 마주한 내리막길에 시원한 바람이 머리를 달게 흐트러트린다.
거울에 비친 갈색 눈동자를 마주한다. 어둠 속 방은 전등에서 우러나온 은은한 등빛으로 따스하게 물든다. 빨래를 돌린 각양각색 하얀 여름옷은 빨래 건조대에 널려 밤바람에 너풀너풀 휘날린다. 방 한편에서 홧홧 타오르는 인센스 끄트머리에 먹색 향이 번져 오른다. 모든 불을 끄고, 적요에 살아나는 희미한 감각으로, 이내 몸에 힘을 푼다. 노곤해진 나의 코에서 문득 색색 소리가 난다. 곧 잠들겠구나, 숨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잠들어간다.
짙은 멍이 희미해지는 과정을 작업 방식에 녹여본다.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그리되, 우측으로 갈수록 점차 채색을 덜어내어 희미해지는 잔상이 가로로 길게 늘어진다. 그 방식은 여러 차례 색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나에게 반대로 채색의 겹을 어떻게 덜어낼지 고민하게 한다. 가장 처음에 그리는 식물은 선명한 형상으로, 짙은 발색으로 그린다. 그다음 이미지는 얼마나 덜 그릴까, 아른아른 그려본다. 어느 부분을 덜 칠할까. 그다음 형상은, 얼마나 더 덜어낼까. 어떤 곳을 생략할까. 어떻게 그리지 말까. 물이 빠지듯 한지 위에 엷게 자리하는 나의 그림을, 다시 천천히 바라본다. 흐릿하고 모호할수록, 더욱 주의 깊게 주시한다.
꽃잎 모양 접시에 한 칸씩, 물감을 채운다. 흐릿한 먹선 안에 색을 또렷하게 채운다. 배경을 비운다. 점점 한지에 입히는 색을 비운다. 차가운 커피를 마실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를 채운다. 꼴깍꼴깍 커피를 마신다. 커피잔을 비운다. 땀이 살짝 나는 날씨에 어울릴 쿨 재즈를 작업실에 채운다. 소란했던 잡념을 비운다. 인중에 맺힌 땀을 훔친다. 머리를 말끔하게 쓸어올려 동그랗게 말아 묶는다.
에세이 <칵테일 파티 이펙트>, 2025년 6월
Lately, I find myself not wanting to know the names of unfamiliar plants. I’m drawn instead to the perspective that observes emotions too ambiguous to name. I’m searching for the link between these two impulses. Today, I want to talk about a new way of seeing—one that lets unfamiliar plants remain as they are, unfamiliar; that resists defining states of mind with clumsy or excessive adjectives; that allows both plants and emotions to simply exist.
Perhaps to describe that gaze, I end up borrowing the language of silence. There’s an Arabic proverb that says, “The tree of silence bears the fruit of peace.” That line has stayed with me for a long time. You once told me to trace the path along which my silences unfold. For me, silence was like pressing a pause button in moments of extreme stress—when I felt I had reached my limit. There were also times when I truly didn’t know what to say, so silence was the only possible response. To extract that vague, painful feeling and give it a single name—to be asked to articulate what I can barely grasp—has always felt difficult. I used to think such avoidance was a kind of emotional neglect. Maybe, if I couldn’t explain or justify my feelings, I wanted to gently blur them, even misread them, with care. I dare to call this an attentive indifference.
In my work, silence becomes a way of expressing ambiguity, and plants embody that mode. Plants, though speechless, are living beings that strive to maintain homeostasis with their surroundings—much like the human body. Lately, the plants I draw are covered with sharp thorns or fine hairs. Some hold dense black masses within, others stretch outward in rounded forms. The species I’ve been observing lately are full of fragile seeds that seem ready to scatter at a touch—an image I find deeply appealing, though others find it unsettling. I enjoy projecting my own sensibilities onto these strange, grotesque plants, reimagining them as new forms. Someday, I hope I can explain that fascination with clearer logic.
People often ask whether the plants I paint actually exist. I don’t mind not knowing; I meet them as images rather than as specimens. Still, it’s intriguing how many are curious about their names. I’ve realized that the way I observe plants resembles how I face my own emotions. I’m trying to condense that relationship—the cause and echo between them—into the form of plants. I have much to study.
This has grown long, but unlike my earlier works, ambiguity, the refusal to define emotion, has become the central seed of my practice. I wonder what effects silence has on one’s inner state—and what stories I might tell once that silence eventually breaks. Perhaps, as I grow older, I will come to know naturally.
Standing at the end of the year, I’ve briefly looked back on my work so far. I’ll write again, from time to time.
<A Certain Letter>, December 2024